본문 바로가기
일상의 기록

그시절 학교폭력을 벗어났던 방법

by 빠라밤 2023. 1. 5.
728x90

 

요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재밌게 보았습니다.

극중에서 송혜교가 어린시절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장면을 보면서 저의 어린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중국 연변의 어느 시골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잠깐 학교자랑을 하자면 이 학교는 독립투사들이  세운 학교였습니다. 동포들을 모아놓고  한글을 가르치고 민족에 대해 가르쳤는데  개교 2년만인 1920년 가을에  일본놈들이 불을 질러서 잿더미가 된적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민족지사들과 그 지역 동포들이 다시 돈을 모아서 학교를 재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학생이 줄어들어 폐교가 된 상태입니다.

 

그런 역사가 있는 학교였고  저의들에겐 자랑스러운 학교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학교에도 학교폭력은 있었습니다.

 

시골지역에 있는 유일한 중학교이다 보니 그 주위에 있는  여러 마을의 학생들은 중학생이 되면 전부다 그리로 다닐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학생이 많아지고 그중에는 요즘 표현으로 일진이라고 하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저의 동네에는 몇명의 여학생과 저를 포함한 세명의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여학생들은 싸우는일 없이 학교에 잘 다녔지만 남학생들의 세계는 그렇치 않았습니다.  수컷들은 천성적으로 서열문화가 있는것인지 갓 중학교에 입학한 꼬맹이들이지만 얼마안지나서 서열이 나뉘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두명의 친구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라 등교도 함께 하고 집에 갈때도 함께 다녔습니다. 학교가 집에서 멀리 떨어져있다보니  자전거를 타고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따라  등하교를 하였습니다.

 

어느날 수업을 모두 마치고 집에 가려고 학교 정문을 나왔는데  다른반에 다니는 한 학생이 일진들에게 둘러싸여 맞고 있었습니다.  말릴까 생각하며 잠깐 책가방을 내려놓고 머뭇거리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그냥 가자고 했습니다. 사실 저와 제 친구들은 그 맞고있는 학생이랑 친한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같은 학년이었고 얼굴이나 아는 정도였습니다.

 

집에 가는길에 친구가 그 일진들에 대해 얘기를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학년 애들인데  여려명이 어울려 다니는 패거리들이고  학교가 있는 동네에 사는 애들이라고. 이미 또래들중에선 유명한 일진들이었고 학년에서 서열정리를 하느라고  애들과 괜히 시비를 걸어서 패고 다니는중이었습니다.

 

사실 어른이 된 지금에 생각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애들의 세계를 잘 모르는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을 거쳐왔음에도 어른이 되면 어른의 시선으로 애들을 보기때문에 그들의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훈계만 하는 경우가 수두룩 하죠.

 

중학교 1학년생이 되어서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생기고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을 쯔음 우리에게도 올것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지난번에 맞고 있는 친구를 도와줄까 하고 잠깐 머뭇거렸던게 빌미가 되어 일진들의  타켓이 된것입니다.

 

학교수업이 끝나고  우리셋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나섰는데 뒤에서  일진중 한명으로 보이는 녀석이 따라오더니  학교뒷쪽으로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순간 직감했습니다. 오늘은 순순히 집에 갈수없다는것을...

 

그녀석의 뒤를 따라가니 벌써 일여덟명의 일진들이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고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구경하러 온 애들까지 모여있었습니다. 둥그렇게  서있는 일진무리들  한가운데  들어가노라니 왠지  다시는 빠져나올수 없는  함정에 빠진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많은 애들이 있다는것에 놀랐습니다 .

 

자전거에서 내리니 일진중의 한명이 몽둥이를 들고  다가오더니 뭐라고 욕을 하면서 제 친구의 턱밑에 들이댔습니다. 아마도 위협을 주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 체구는 작지만 날렵했던 제 친구는 왼손으로 잽싸게 몽둥이를  잡더니 오른손으로 그녀석의 얼굴을 가격해버렸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골 촌구석에서 자란 우리는 일진들이 무서운줄을 몰랐습니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은 뒤로 휘청했고  그다음엔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셋은 일진들과  뒤엉켜 난투를 벌였습니다.  치고 박고 뒹굴면서도 아픈줄도 몰랐습니다. 싸우는 와중에 얼핏 든 생각은 옆에 구경하던 애들이랑 일진들이랑 얼굴이 헷갈려서 다 한패거리 같아보였습니다. 때는 서쪽하늘로 해가 넘어가려던 시간이어서 마지막 햇살이  막 비춰왔는데  그 빛을 받아 벌겋게 반사된 얼굴들이 다 비슷비슷해보였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어려서부터 태권도나 혹은 복싱이나 격투기를 배우는 애들이 있다보니  싸움을 잘하는 애들이 있지만  그시절 우리게게는 체력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시골에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부모님 농삿일을 도우며 살다보니 우리셋은 체력은 끝내줬습니다. 하지만 셋이서 일여덟명과 맞붙은것이니  오래싸우면 분명히 낭패를 봤을것입니다.  싸우는 동안에는 아드레날린이 분비돼서 아픈것도 힘든것도 몰랐던것이죠. 그렇게 싸우고 있는데 누군가 교장선생님이 온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순간 일진들과 우리는 그자리에서 싸움을 뚝 멈췄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교무실로 끌려갔고  교장선생님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교장선생님도 일진들의 평소 학교생활을 알고있었던터라 훈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셋에겐  집에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돌아오는길에 온몸의 힘이 쭉 빠지면서 너무 나른하여 그냥 주저앉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체력이 방전된것이죠, 서로 맞은데 없냐 하고 보니까 친구 한명이 얼굴에 자그마한 상처가 났습니다. 다행이 심한 상처가 아니라 집에가서 둘러댈만하다고 했습니다.  그시절 우리는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아무일 없다는듯이 싸운걸 숨기고 다녔습니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우리는 영웅이라도 되는듯이 애들의 화제거리가 되었습니다. 다들 일진녀석들이 두려웠고 싫었던것입니다. 우리가 굴하지 않고 싸웠다는것에  대신 쾌감을  느끼고 있었던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괴롭힘은 그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학교가 끝나서 집에 갈때면 일진무리가 몽둥이나 삽을 들고 어김없이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어쩔수 없이 다시 학교에 들어오거나 다른길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어떤날은 다시 싸워보려다가 여러명이 몽둥이와 삽을 휘둘러대며 달려들어서 어쩔수 없이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학교가 있는 동네를 벗어나면  이동네사람들이 농사짓고 있는 밭이 있었고  그 밭을 벗어나면 두만강이 흘렀습니다. 일진들에게 쫒겨서 두만강 제방뚝을 따라서 집까지 걸어가는 일도 잦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선생님들은 이런 일을 해결못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크게 관심이 없었던것인지 아니면 그저 애들이니 싸우면서 크는거라 생각했던것인지~  그러나 그 당시의 우리는 누군가가 해결해주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에게는 말씀드릴수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싸움질 하고  맞고 다니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더큰 문제는 2학년에 다니는 몇명의 선배들까지 우리에게 지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지들이 아는 동생과 싸웠다는것입니다. 아마도 그 일진녀석들과 친한것 같았습니다. 

 

우리셋은 생각해봤습니다. 만약 일진녀석들에게 지고들어가면  중학교생활 내내   그녀석들의 뒤치닥거리나 해야할것이니 절대 질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1대1 로 맞짱을 뜨면 충분히 이길수 있을것 같은데 그녀석들이 그렇게는 안할것 같았습니다. 제일 걱정거리는 학교다니면서 공부를 제대로 할수 없는것이었습니다. 매일 머리속에는 어떻게 집으로 가야할지를 고민하느라 공부가 잘될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다른길로 도망 다닐수도 없었습니다. 

 

요즘같은 세상이면 전화로 경찰이라도 불렀을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고 시골이라 한개 마을에 전화기 한대가 있던 시절입니다. 게다가 도시와 떨어져 있다보니  파출소에 신고하면 다음날에나 경찰 한명이 겨우 찾아오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다음날 우리는 책가방에 칼을 하나씩 넣어가지고 왔습니다. 집에서 과일깍던 칼이나 접었다 펼수 있는 칼을 넣어왔습니다.  집에가는길에 역시나  일진들 무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방에서 칼을 꺼내들고  죽고싶으면 한번 덤벼보라고 했습니다.  일진들도 칼은 무서운가봅니다. 누구도 함부로 가까이 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들을 뚫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다음날에도 일진들은 우리를 막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무사히 집으로 갈수 있겠다 싶었지만 그것도 며칠뿐이었습니다.  어느날부턴가 이녀석들이  집에 가는 우리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칼을 꺼낼까봐 함부로 가까이에는 다가오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지겨운 녀석들입니다. 

 

싸워도 안돼, 칼을 들어도 안돼,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저 평화롭게 학교다니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보였습니다.

그렇게 한달 두달 지내다 보니 우리셋은 많이 지쳤습니다. 학교를 안다니고 싶은 생각도 들었고  더이상 학교 생활이 재미도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를 괴롭히던 일진들을 단숨에 제압할수 있는 방법이 생겼습니다.

 

어느날 학교에서 화장실에 갔다오면서 누군가 지나가는걸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학교 3학년 짱이었는데 학생들중엔 누구도 함부로 할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3학년 짱이다보니 이 학교에선 제일 대장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교실로 돌아온 저는 제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될지 안될지는 모르지만 3학년 짱을  찾아가서 도와달라 하는게 어떻겠냐?  친구들은 친하지도 않는데 도와주겠냐며  반신반의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다른 뾰족한 방법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길로 3학년 짱을 찾아갔습니다. 학교 동쪽 담장을 넘어가면  커다란 백양나무 세그루가 가지런히 자라고 있었는데 그 나무밑이  학교짱과 그의 몇몇 친구들의  아지트였습니다. 

 

우리셋이 담장을 뛰어넘어가자  그들은 놀라는듯 하더니 여긴 왜 왔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학교짱에게 말했습니다.

공부를 해야되는데 맨날 싸우다보니 제대로 할수도 없고 집갈때도 매일 괴롭힘을 당하니  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않고 말해줬습니다. 

그들은 꽤나 흥미롭다는듯이 들으며 가끔 웃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눈빛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학교짱은 알겠으니 점심시간에 교실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교실로 돌아온 우리셋은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건지 제대로 알수도 없었고 그냥 멀뚱멀뚱 서로만 쳐다보았습니다. 

 

그날 점심시간이 거의 지나가고  오후 수업시간이 채 시작되기전이었습니다. 복도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교실문이 열리고  3학년학생들이 여러명 보였습니다. 학교짱이 지 친구들이랑 함께 나타난건데  우리반 애들은  무슨일인가 놀라서 당황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같이 가자고 손짓했습니다. 

 

학교짱은 우리를 데리고 일진들이 있는 교실로 찾아갔습니다. 일진무리들은 갑작스러운 학교짱의 방문에 어리둥절해하면서 우리셋과 번갈아 쳐다보기 바밨습니다. 교실에는 다른 학생들까지 많은 애들이 있었지만 숨죽인듯 조용해졌습니다. 

학교짱은 일진들을 향해 딱 두마디를 했습니다. 

 

<다시 건드리면 가만 안둔다.> 

 

그리고는 멀뚱멀뚱 쳐다보는 일진들을 향해 

 

<눈 안깔아?> 

 

순간 그렇게 악당처럼 보이던 일진들이  일제히 순한 양이되어 머리를 숙이고 바닥을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2학년 교실로 찾아갔습니다. 

우리학년 일진들과 친분이 있는 그 몇명학생들이 있는 교실이었습니다.

전교짱 앞에선 2학년 선배들도 순한 양이었습니다.

내 동생들 건드리지 말라는 짱의 말에  그들은 동생인줄 몰랐다고 사과했습니다.

 

학교짱은 나에게 씩 웃어보이더니 교실로 돌아가라고 손짓하더니  친구들과 함께 가버렸습니다.

 

그날 오후부터 우리셋은 편하게 집으로 갈수 있었습니다. 길을 가로막던 일진들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개월을 시달렸는데 하루아침에 해결되니 기분마저 허탈할 정도였습니다. 어쩌다 학교에서 일진들과  마주치면 그냥 째려보고 지나갈뿐 한마디 욕도  한번의 협박도 없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선 이 일이 퍼지고 퍼져서  우리가 진짜로 학교짱의 동생이라고 믿고있는 애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때마다 그냥 웃고 지나갔습니다. 우리의 학교생활이 편해진것이 중요하지 진짜 동생이건 아니건  상관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계속 동생으로 알려지는게 더 유리할지도 몰랐습니다. 

 

그 시절이  까마득히 지나고  어른이 된 지금 , 나는  가끔 설명절에 고향에 가면   그시절 학교짱과 우연히 만날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더이상  멋져보이던 전교짱이 아니라  한 가정의 성실한 가장이자 수염 더부룩한 인상좋은 아저씨가 되어있었습니다. 우리는 옛일을 추억하며 술한잔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320x100